책을 빌려 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주변에서 빌리기, 동네 도서관, 소속이 있다면 소속 기관의 도서관을 이용하기, 어쩌면 각 대형 서점에서 운영하는 유료 구독제 서비스도 빌려 보는 방법에 포함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가 하면, 만약 외국어 구사가 자유롭다면, 저작권이 소멸된 책들은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같은 사이트를 통해 무료로 인터넷에서 원서를 볼 수도 있다. 은근히 잘 알려지지 않은 방법은, 전자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방법인데, 전자책을 자주 접하는 나로서도 이 방법은 좀 양가적인 마음이 들긴 한다. 몇 가지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대부분의 공공 도서관에서 전자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용하려고 보면, 컴퓨터나 핸드폰에 각종 어플리케이션이나 구동 프로그램을 설치하라고 하고, 온갖 불편을 감수하고 다 설치해서 실행하려 하면, 로그인을 다시금 해야 하는데, 수십, 수백 개의 아이디와 비밀번호의 소유자인 현대인들로서는 그걸 올바르게 입력하는 과정까지가 모두 엄청난 수고로움이다. 또한, 정작 이용하려고 했을 때, 찾는 책이 없다면? 이후의 일은 상상만으로도 굉장히 화가 나므로 이만 줄이겠다. 하지만 이쪽 업계가 돌아가는 걸 조금이라도 지켜본 입장에서 변호를 좀 하자면, 애초에 전자책 계약을 하지 않는 도서도 있고, 전자책을 만든다 하더라도, 계약에 대여 금지 규정이 있는 경우도 꽤 있기 때문이다. 아마 각 출판사마다 구독 서비스에 대한 입장이 다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이걸 감수해 볼만한 사소한 장점도 조금 있기는 하다. 빌리고 반납하는 데에 이동이 필요하지 않고심지어 자동 반납이 되기 때문에 연체의 위험도 없다!, 도서관의 전자 도서관 운영 정책에 따라서 때때로 대출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같은 책을 빌려 볼 수도 있으며, 밑줄도 마음껏 치며 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종종 전자 도서관을 이용하는 편이다.
얼마 전의 일이다. 여느 때처럼, 정작 잘 보진 않더라도 뭔가 볼 것이 있나 하고 OTT 플랫폼을 둘러보는 마음으로, 전자 도서관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눈에 한 책이 눈에 띄었다. 처음 보는 책인 거 같은데 익숙하기도 하고, 낯이 익으면서도 또 새로운, 일종의 인문 고전 느낌의 책이었다. 바로 대출을 해서 책을 펼쳤다.펼쳤다는 표현은 과연 적절한가? 역자가 달아둔 머리말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각 분과들이 이룩해 놓은 인간에 대한 연구들을 학제 간 접목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간만에 마음을 잡고, 선택하기가 아닌, 읽기에 돌입하려고 하던 찰나, 내가 마주한 문제는 뷰어였다.
기대를 품고 넘긴 책에는 이미 밑줄이 오만군데 표시되어 있었다. 개인 계정에서는 밑줄이 유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대여 전자책에서 밑줄을 본 건 처음이라 심히 당황스러웠다. 처음에는 매우 귀찮고 성가신 일이라고 생각했다.물론, 코딱지 같은 물질 보다 훨씬 나았다. 이제는 꽤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일전에 비디오 대여점 같은 데에서는 만화책과 책도 함께 대여해주기도 했었는데, 어떤 책에 코딱지가 정말 심각하게 많이 붙어 있어 매우 불쾌했던 기억과 동시에, 그 때문에 넘기면서도 조심스럽게 코딱지를 피하기 위한 부단했던 노력이 떠올랐다. 그렇게 생각할 때, 코딱지는 납득해보려 해도 그 너머의 이해 불가의 영역이기도 하고, 한 사람이 300페이 가량의 코딱지를 거의 5페이지에 하나씩 붙일 정도로 코딱지가 많이 생성되는 게 가능한가, 까지 흐르다 보면, 밑줄이야 굉장히 이해 가능한 차원에 속하는 일이었다. 오늘날 도서관 예절 등을 비추어, 코딱지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 시절엔 종종 있는 일이었다. 물론, 요즘에도 도서관 책에 밑줄 긋는 사람은 종종 있기는 하지만
여하간, 이 밑줄의 흔적이란, 도서관 빌런이라기 보단 일종의 뷰어 오류였다. 그렇게 밑줄과 밑줄이 아닌 열들을 따라가다 보니물론, 밑줄에 어쩔 수 없이 더 눈이 가게 마련이지만, 어쩌면 이 읽기는, 내 이전에 이 책을 빌려 봤던 사람과, 일종의 같이 읽기에 해당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고, 왜 하필 거기에 밑줄을 쳤으며, 그의 삶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이길래 표시를 했는지,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이 읽기는, 본래 본문이 의도했던 읽기와는 또 다른 방법의 읽기가 될 것이었다.아마 그 사람에 대해 내가 알거나, 혹은 더 알고 싶은 사람의 흔적이었다면, 그 읽기는 더욱 흥미진진해질 것이다. 그렇게 초반부의 내용, 아니 정확히는 흔적과 흔적 아닌 것에 집중하다가, 눈 앞에 닥친 일을 마무리해야 했기에, 다음에 이어 읽기로 하고는 책을 이만 덮었다.
바쁜 일에 치여 며칠이 흘렀고, 그 책, 혹은 그 책을 빌려본 사람이 다시금 떠올라 전자 도서관에 재접속했을 때, 내 대출 현황에는 아무 책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반납 기한이 지나진 않았을테고, 그 사이 반납하기는커녕 접속한 적도 없는데? 싶었지만, 대여 서비스를 하는 전자책이나 구독제 시스템의 경우, 영상 OTT 서비스처럼 계약 기간과 여건에 따라 책의 드나듦이 있다는 걸 아는 입장에서 영 이상한 일은 또 아니었다. 대충 그런 이유였겠거니, 읽다가 그저 반납으로 귀결되어 내 손 바깥으로 흘러가버린 수많은 책들처럼 그 책도 내게서 금방 잊혀졌다.
시간이 꽤 흐른 무렵, 나는 인간과 그 심리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그때 대출해 잠깐 보았던 그 책이 떠올랐다. 어쩌면, 필요에 의해서라면 그때보다 더 잘 읽힐 수도 있고, 이번엔 별다른 오류 없이, 즉 다른 대출자의 아무런 흔적이나 방해 없이 볼 기회였다. 그러나 지난 번, 자동 반납되어 전자도서관에서는 사라졌다는 기억에, 이번에는 구매해서 볼 요량으로 책을 검색했다. 검색어: 인간 분류 총론, 그러나 어떤 서점에서도 그 책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간혹, 절판 도서들은 검색어 바깥의 영역에 잡히기도 하여 그런 영역까지 시시콜콜하게 찾아보았으나 검색 결과에 그런 책은 없었다. 심지어 국립중앙도서관 납본 사이트에서도 그 존재와 기록에 대해 찾아볼 수 없었다. 했다. 저자명인 ‘앤쏘니 킨’으로도 검색해보았으나 결과는 같았다.
나는 그만 의아해지고 말았다. 책의 존재에 대한 의심은 뒤로 하고, 그 책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책이었다면, 내가 봤던 문장의 의미는 무엇이었으며, 그 오류들은 또 무엇이었을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우리는 오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세상에 없었고 추후 세상에 없을 예정인, 지금의 존재들에게도, 우린 오류라는 낙인을 손쉽게 붙일 수 없는 건 아닐까?